새광명지방회 개회설교요약 201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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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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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이처럼 사랑하사
요한복음3;16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무척 사랑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독생자 예수님만 믿으면 누구든지 죄사람을 받고 구원을 받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이와 같은 말씀이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가면 있습니다. "하나님이 조선을 이처럼 사랑하사"입니다.
조선왕족들은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 서민들이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받은 것을 외면하고 오직 당파 싸움에 몰뚜하였습니다. 대원군은 쇄국정책으로 외세의 간섭을 두려워 하였고 천주교인들은 이미 절두산에서 수천명이 참수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게신교선교사들은 이에 더욱 용기를 내어 조선을 선교하고자 하였습니다. 마침 알렌이라는 의료선교사가 왕족이었던 민영익을 서양의술로 살려내자 명성황후는 광혜원터를 제공하였고 선교사들은 병원과 학교 구호기관을 설립하여 선교하기 시작하였습니다.예수님도 마태복음4;23절에서 처럼 서민 지역인 갈릴리를 두루다니시며 가르치시고,복음전파하시며,가난한자 병든자를 고치셨습니다.
헤론은 미국 테네시의과대학을 수석하고 교수로 초빙받은 상태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당시 세계에서 가장 알려지지 않은 나라 가장 작은 조선에와서 창궐하는 전염병과 싸웠습니다. 주면의 사람들이 만류함에도 광혜원이 왕복들만을 위한 병원이 아니라고 하며 서울 변두리를 돌아다니며 전염병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고쳤습니다. 그러나 끝내 과로와 점영병으로 1897년 34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그의 시신이 처음 안장된 곳이 양화진이 된 것입니다.
언더우드는 1885년 부활절에 26세로 조선에 들어와서 새문안교회와 연세대학교를 세우고 조선에 학교를 세우는데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이는 그의 형이었던 토마스언더우드가 타자기사장이었는데 재정적인 후원자였습니다.
무어는 복음에는 차별이 없다며 백정들을 많이 전도하였는데 승동교회를 설립하고 그가운데 제중원 1회 졸업생으로 박서양교수를 배출하는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그 역시 과로와 전염병으로 1906년 46세의 나이로 죽어 양화진에 묻혔습니다.
브로크만은 한국 젊은이에게 꿈과 비전을 심어주기 위해 한국YMCA를 설립하고 독립운동과 농촌 사회계몽운동,스포츠 보급에 큰 공헌을 하다가 과로로 쓰러져 미국으로 돌아갔으나 결국 숨을 거두고 그가 원하던대로 조선 땅에 그의 가족들과 함께 묻혔습니다.
레이놀드는 햄펀시드니대학을 최우수성적으로 졸업하고 조선에서 힘든 성경번역에 크게 공헌하였습니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였지만 서민의 글짜였던 한글은 당시 사용되지 않았지만 성경을 통하여 서민들이 오늘날처럼 쓰여지게 되는데 절대적인 공헌을 한것입니다.
벧델은 나라를 빼앗겨 억울한 조선인의 대변자였습니다. 그는 매일신보와 코이아데일리뉴스를 통해 일본의 식민지 정책을 전세계에 알렸고 국채보상운동등 민족운동에 기여하다가 여러차례 옥살이로 37세에 죽어 양화진묘역에 안장되었습니다. 일본은 그의 묘비를 망치로 회손 하였습니다.
아펜젤러는 두루신학생시절 결혼 두달만에 자원하여 1885년 부활절에 한국선교를 시작하였고 감리교 정동교회와 이화여대,배재대학등을 세웠으며 성경번역에도 활동하던 중 목포에서 열리는 성경번역회의에 참석하기위해 가다가 군산 앞바다에서 배가 좌초되어 1902년 44세로 순직하였습니다. 감리사 위대한 선교사였던 그의 시신은 찾을 길이 없어 양화진에는 그를 기리는 기념비만 있습니다.
양화진에는 이와 같은 선교사들이 411기나 묻혀 있고 이들은 한결같이 모국에서의 평안한 생활을 버리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동방에 작은 나라 조선에 와서 불쌍한 조선 백성을 위하여 재산과 명예와 생명까지라도 아낌없이 희생한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은 복음을 위하여 택함을 받았으며 복음의 빚진자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지상명령은 만민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초대교회교인들은 성령이 충만하여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말씀하였습니다. 합력하여 선교하는 감리교 새광명지방 모든 교회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요한복음3;16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무척 사랑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독생자 예수님만 믿으면 누구든지 죄사람을 받고 구원을 받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이와 같은 말씀이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가면 있습니다. "하나님이 조선을 이처럼 사랑하사"입니다.
조선왕족들은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 서민들이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받은 것을 외면하고 오직 당파 싸움에 몰뚜하였습니다. 대원군은 쇄국정책으로 외세의 간섭을 두려워 하였고 천주교인들은 이미 절두산에서 수천명이 참수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게신교선교사들은 이에 더욱 용기를 내어 조선을 선교하고자 하였습니다. 마침 알렌이라는 의료선교사가 왕족이었던 민영익을 서양의술로 살려내자 명성황후는 광혜원터를 제공하였고 선교사들은 병원과 학교 구호기관을 설립하여 선교하기 시작하였습니다.예수님도 마태복음4;23절에서 처럼 서민 지역인 갈릴리를 두루다니시며 가르치시고,복음전파하시며,가난한자 병든자를 고치셨습니다.
헤론은 미국 테네시의과대학을 수석하고 교수로 초빙받은 상태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당시 세계에서 가장 알려지지 않은 나라 가장 작은 조선에와서 창궐하는 전염병과 싸웠습니다. 주면의 사람들이 만류함에도 광혜원이 왕복들만을 위한 병원이 아니라고 하며 서울 변두리를 돌아다니며 전염병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고쳤습니다. 그러나 끝내 과로와 점영병으로 1897년 34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그의 시신이 처음 안장된 곳이 양화진이 된 것입니다.
언더우드는 1885년 부활절에 26세로 조선에 들어와서 새문안교회와 연세대학교를 세우고 조선에 학교를 세우는데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이는 그의 형이었던 토마스언더우드가 타자기사장이었는데 재정적인 후원자였습니다.
무어는 복음에는 차별이 없다며 백정들을 많이 전도하였는데 승동교회를 설립하고 그가운데 제중원 1회 졸업생으로 박서양교수를 배출하는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그 역시 과로와 전염병으로 1906년 46세의 나이로 죽어 양화진에 묻혔습니다.
브로크만은 한국 젊은이에게 꿈과 비전을 심어주기 위해 한국YMCA를 설립하고 독립운동과 농촌 사회계몽운동,스포츠 보급에 큰 공헌을 하다가 과로로 쓰러져 미국으로 돌아갔으나 결국 숨을 거두고 그가 원하던대로 조선 땅에 그의 가족들과 함께 묻혔습니다.
레이놀드는 햄펀시드니대학을 최우수성적으로 졸업하고 조선에서 힘든 성경번역에 크게 공헌하였습니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였지만 서민의 글짜였던 한글은 당시 사용되지 않았지만 성경을 통하여 서민들이 오늘날처럼 쓰여지게 되는데 절대적인 공헌을 한것입니다.
벧델은 나라를 빼앗겨 억울한 조선인의 대변자였습니다. 그는 매일신보와 코이아데일리뉴스를 통해 일본의 식민지 정책을 전세계에 알렸고 국채보상운동등 민족운동에 기여하다가 여러차례 옥살이로 37세에 죽어 양화진묘역에 안장되었습니다. 일본은 그의 묘비를 망치로 회손 하였습니다.
아펜젤러는 두루신학생시절 결혼 두달만에 자원하여 1885년 부활절에 한국선교를 시작하였고 감리교 정동교회와 이화여대,배재대학등을 세웠으며 성경번역에도 활동하던 중 목포에서 열리는 성경번역회의에 참석하기위해 가다가 군산 앞바다에서 배가 좌초되어 1902년 44세로 순직하였습니다. 감리사 위대한 선교사였던 그의 시신은 찾을 길이 없어 양화진에는 그를 기리는 기념비만 있습니다.
양화진에는 이와 같은 선교사들이 411기나 묻혀 있고 이들은 한결같이 모국에서의 평안한 생활을 버리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동방에 작은 나라 조선에 와서 불쌍한 조선 백성을 위하여 재산과 명예와 생명까지라도 아낌없이 희생한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은 복음을 위하여 택함을 받았으며 복음의 빚진자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지상명령은 만민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초대교회교인들은 성령이 충만하여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말씀하였습니다. 합력하여 선교하는 감리교 새광명지방 모든 교회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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